|2026.03.03 (월)

재경일보

6.25전쟁 이후 북한 경제 몰락은 공산주의 실패 때문만은 아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북괴 수장 3부자에 책임 물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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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은 자유민주주의 - 자본주의 세력이 경제적으로 압승을 거두며 끝났다. 공산주의의 실패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 국가가 아직도 경제적으로 열세에 있는 원인이 되었으며, 시장주의 경제 체제가 경제 성장에 우월함을 증명했다. 하지만 북한이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점은 체제 실패만을 원으로 꼽기 부족한 면이 있다. 북한 경제는 폴란드, 체코 등 옛 동구권 국가에 비해서도 처참할 정도로 열악하며, 정치∙사회∙외교의 불안함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냉전 종식 후에도 북한이 못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80년대 잇다른 정책 실패

1970년대만 해도 북한은 한국보다 경제적 우위에 있었다. 6.25이후 풍비박산 난 한국과 달리 북한은 일제의 산업기반 시설이 남아있었고, 1960년대부터 닦아둔 경공업을 기반으로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반부턴 농업 기계화를 추진해 대내 농수산물 수요를 충족했고, 식료품 배급에도 문제가 없어 주민들은 북한이 사회주의 낙원으로 발전할 거란 장미빛 전망에 취해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1980년 후반 대형 정책을 잇따라 실패하며 북한 경제 위기가 시작됐다. 첫 번째 실패는 '서해갑문 건설 계획'이었다. 서해갑문은 남포시 서쪽 15Km 지점에 위치한 갑문(수면 높이가 다른 두 수역을 연결한 수문)으로,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하는 도로 역할도 하고 있다. 본래 1981년 착공해 3년 이내 완공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북한 토목 공사 기술 수준이 낮아 5년 만인 1986년에야 완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실공사로 인한 누수와 파손으로 지금도 보수공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완공후 대동강 유역 기후가 변화해 초래해 농어업 생산량이 급감하는 문제를 초래했다. 이 댐을 건설해 발생한 손실은 70억 달러에 달했다.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방북해 참석한 임수경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방북해 참석한 임수경

두 번째 실패는 평양에서 개최한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이었다. 본래 냉전시기 사회주의 국가 청년 행사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개최되던 행사로,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자극받은 북한 정부가 의욕적으로 개최했으나 이후 동구권 공산 독제 체제가 붕괴되며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했다. 순안공항 확장, 광복거리 조성, 류경호텔 건설 등 대규모 건설사업을 벌였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자 당초 예상했던 관광수입을 기대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결국 소모된 지출금은 북한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손실액은 약 40억 달러로 추정된다

마지막은 '순천비날론연합 기업소' 건설 실패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에서 400여 가지 화학제품을 생산해 경제적 효과를 얻을 것으로 기대했다. 김일성은 의류원단인 비날론에 "주체 산업"이란 타이틀을 붙이고 대량 생산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비날론 생산은 대규모 생산시설을 필요로 했고, 제조단가도 비쌌으며, 원자재 못지 않게 많은 폐기물이 나왔다. 특히 생산과정에서 소요되는 전기량이 많아 전력 부족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생산된 비날론의 품질도 문제였다. 염색이 힘들어 다양한 색을 낼 수 없었고, 착용감이 뻣뻣하고 보온성이 떨어지는 등 옷감으로 부적합했다. 열기에도 약해 줄어들거나 탈색되기 일쑤였다. 당초 예상했던 세계 수출은 실현되지 못했고 북한은 이 사업으로 100억 달러 가량의 손실을 입었다.

☐ 위기 극복 못했다... 고난의 행군

80년대 정책 실패는 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이어졌다. 대기근 발생으로 인해 북한 정부의 쌀 배급량은 급속히 줄었고, 배급에만 의존해 살던 북한 주민은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자연스럽게 장마당 형태의 시장 경제 체제가 들어섰고, 이는 중앙집권적 경쟁 체제가 약화되는 원인이 되었다. 80년대 실패가 경제적인 것에 그쳤다면, 고난의 행군은 북한의 정치 사회 시스템까지 위협했다고 볼 수 있다.

 

기근에 시달리는 북한 어린이들
기근에 시달리는 북한 어린이들

대기근이 발생한 원인은 김일성이 주장한 '주체농법'에 있다. 이 농법은 부식토에 미리 강냉이(옥수수)알을 심어 싹을 틔운 뒤 밭에 옮겨심는 방법인데, 평지가 부족한 북한의 특성상 산비탈을 깎아 만든 다락밭을 옮겨다니며 심어야 했다. 작물이 옥수수인 탓에 인력소요가 커 사회 전체의 생산능력이 감퇴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지력(地力)을 많이 소비하는 옥수수를 주 작물로 선정한 탓에 지력 고갈이 가속화됐다. 여기에 이상 냉온 등 자연재해까지 겹치자 북한 주민은 당장 입에 넣을 곡식 몇 알을 구하지 못해 배를 곯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북한 외무성은 당시 22만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나, 탈북자 황장엽은 회고록에 아사자만 300만명이라고 적었다. 살아남은 자들도 지난친 영양결핍으로 장애가 생기기 일쑤였고, 10~20대 평균 신장은 150Cm대로 줄어 '발육부진 세대'란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1994년 GNI는 1인당 400달러에서 1995년에 200달러로 급감했고, 이후 2012년까지 600달러를 회복하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도 시장화 부작용으로 양극화 현상이 벌어졌고, 노동당원 등 일부 출세 계층과 일반 주민 간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 자생적 자본주의 시도하지만.... 심각한 부정부패로 개선 여지 보이지 않는다

북한 노동당은 건립 55주년 행사에서 고난의 행군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실상 고난의 행군 도입기인 90년대 초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북한 경제는 자생적 자본주의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행증 소지법 등 시대착오적 법령은 시장 경제 발달에 악영향을 주고 있으며, 북한 주민은 살아남기 위해 뇌물 수수를 선택한다. 상인의 봇집과 발로 인해 시장은 조금씩 팽창하지만 부정부패란 비합리적, 비합법적 규제로 인해 북한이 경제가 회복할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80년대부터 시작된 북한 경제의 몰락의 본질은 공산주의의 한계보단 북한 김씨 삼부자의 무능 탓이 크다. 그들은 잘못된 정책을 추진해 북한 주민을 경제적 나락으로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특권화 책임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 덕에 북한은 멸망이 가까운 비정상 집단이 되었고 남북 통일의 길은 더 멀어졌다. 공산주의 체제를 채택한 탓이라며 북괴 수장의 짐을 덜어주는 주장을 하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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