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의 경기 부진, 일시적인 현상일까?
말레이시아, 베트남, 이란, 캄보디아, 라오스... 이 국가들은 1970년대만 해도 '저개발국(newly industrialized economies; NIEs)'으로 불렸다. 하지만 저개발국이란 명칭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가 문제로 제기된 데다, 1980년 이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하며 '신흥국(emerging and developing economies)'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신흥국 경제 동향은 또다시 이름을 잃을지 모를 정도로 부진하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선진국과 신흥국의 성장률 간에 큰 차이가 없었다. 1980년대 선진국에 비해 0.3%포인트 높던 신흥국 성장률이 1990년대에도 1.0%포인트 높은 데 그쳤다. 그러나 200년대에 들어서자 양측 간 성장세 격차가 4.3%포인트까지 벌어졌다. 개혁개방과 선진국 기업들의 글로벌화로 인한 중국 경제의 고속성장과 함께 브라질과 같은 자원 수출국이 원자재 가격 인상에 힘입어 급격한 성장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후인 2010년대 들어 성장률 격차는 3.9%포인트로 다소 낮아졌고, 최근 3년 동안 2012년 4%포인트 수준에서, 2013년 3%포인트 대, 지난해에는 2%포인트 대로 성장률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제 선진국의 그것과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다. 신흥국의 고성장세는 2000년대 만의 독특한 현상이었던 걸까?, 아니면 저성장으로 인한 일시적인 부진일 걸까?
<신흥국 경제 부진의 원인>
1. 쉽게 말하자면, 선진국으로부터의 낙수효과가 사라졌다
선진국 경제는 금융위기 직전 3% 성장률을 기록했으나 위기 이후 1% 대에 그치고 있다. 일차적 원인은 2000년대 중반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부채 확대가 더 이상 용이하지 않다는데 있었고, 이차적으론 고령화와 노동생산성 부진으로 선진국의 경기 회복 속도가 부진하다는 데 있었다. 선진국 총부채 증가추세는 금융위기 직전 8%에서 3%로 줄어들었고,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13%에서 16%로 상승했다.
선진국의 신흥국으로의 경기 파급력도 약화되었다. 경기확장기에 선진국은 신흥국으로부터 수입을 늘여 신흥국 경제 성장을 이끌었으나 최근에는 그 연결고리가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선진국 경제성장률과 신흥국의 對선진국 수출 사이 상관계수는 2006년~2010년 사이 0.68이었으나 2011년~2015년 1분기에는 0.26으로 감소했다.
2. 중국이 세계 경제를 이끌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성장기엔 신흥국들이 원자재와 중간재 등을 수출함으로써 성장의 과실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경제가 추락하자 신흥국들이 물건을 판매할 시장도 사라져버렸다. 중국 정부가 '신창타이'라 불리는, 중국 경제 재편 정채에 온 힘을 쏟고 있지만, 그 청사진도 이전과 같은 투자 중심 성장이 아닌, 내수 소비 중심의 성장이다. 중국의 성장에서 투자와 소비의 비중이 변하는 것만으로도 신흥국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중국은 버블 붕괴 이후 투자율이 급락한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GDP 대비 투자율이 아직 높은 편이지만, 투자 증가율은 이전 시기의 절반 수준인 10% 초반에 그치고 있다. 투자의 상당 부분을 중앙정부의 인프라 투자가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속가능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변화는 신흥국들에게 주요 수출품목의 수요 부진과 그에 따른 가격 하락이라는 이중고를 안겨줬다.
3. 세계는 더 이상 '세계의 공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90년대 이후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분업구조가 확대되면서 세계교역이 빠르게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뿐만 아니라 여타 신흥국도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해 세계의 공장을 형성하는데 일조했다. 아세안 국가들의 대중 수출은 70%가 중간부품이었으며, 전체 교역 중에서 중간재 비중은 1990년 이후 2008년까지 꾸준히 증가하여 60%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 확산 속도가 더뎌졌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신흥국으로 향하는 외국인 직접투자 증가율 하락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교역에서의 중간재 비중 감소다. 90년대 40%를 넘어섰던 외국인 직접투자 증가율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급락한 후 최근에는 한자릿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2000년대 중반 61%까지 높아진 중간재 비중은 지난해 58%로 낮아졌다. 금액 기준으론 오히려 감소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국이 스마트폰을 수출할 때, 일정 부품은 한국에서 생산하지만 나머지는 베트남 공장에서 조립, 가공한다. 해외 생산 비중을 전체 부가가치에서 베트남 부분품이 차지하는 비중이라 할 때, 비중이 2008년 47%에서 2012년 45% 정도로 감소한 것이다. 성장률에 비해 저조한 무역 증가율이 장기간 진행되는 경우, 외국인 직접투자나 설비투자가 줄어들어 신흥국에는 상당한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4. 마지막 보루인 '자원'마저 가격이 폭락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을 비롯해 금속, 식료품 등 원자재를 공급해온 남미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2000년대 중반 배럴당 20~30 달러 수준이었던 국제유가가 100 달러를 넘으면서 원자재 수출 경제규모가 두 배 이상 확대되자 급격한 성장을 경험했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국제유가가 배럴당 50 달러 이하로 급락하면서 자원 수출국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원유뿐만 아니라 곡물, 금속 등 여타 원자재 가격도 2008년에 비해 30% 가량 하락했다. 중국 경기 둔화로 원자재 수요가 부진한 가운데 생산량은 꾸준히 확대되면서 국제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원자재 비중이 높은 국가일수록 성장률이 큰 폭으로 하락했고, 브라질, 러시아 등 일부 국가는 금융 불안이 발생해 위기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S&P는 지난 9월 브라질 신용등급을 투기등급으로 하향 조정하였으며, 러시아도 이미 두 개의 신용평가 기관에서 투기등급을 받았다.
흔히 '네덜란드 병'이라 불리는 '자원 부국의 비극'이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 병이란 자원 수출로 일시적인 경제 호황을 누렸던 국가에서 물가와 통화가치 상승으로 제조업이 쇠퇴해 경기침체를 겪게 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신흥국 통화는 호황을 노리고 몰려든 선진국 자본에 힘입어 일시적인 강세를 보였으나, 불황이 찾아오자 통화사치 상승이 제조업 발전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되었다.
한국, 강 건너 불구경할 때가 아니다
신흥국 경제의 구조적 부진이 이어진다면 한국 경제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신흥국에 대한 수출로 한국 경제가 얻는 부가가치는 GDP의 23%에 이르는데다, 미래불안과 가계부채 부담 등으로 내수기반 성장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회안전망 확충과 동시에 규제완화를 통해 서비스 부문의 성장을 도모하는 한편, 기업 수준에는 신흥국 성장의 차별화를 고려한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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