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와 사법부가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근로시간 단축, 통상임금 확대, 법인세율 인상 등 개혁적 경제 정책과 제도를 몰아붙이면서 재계 곳곳에서는 올해 내내 한숨과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기업들이 잘못된 관행을 고칠 필요는 있지만, 현실적 지원이나 대책도 없이 '많이 고용하고 임금도 올리면서 안정적 직장을 보장해주고 근로시간도 줄이라'는 식의 요구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더구나 재계의 우려와 요청을 전달해야 할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등 경제단체들이 '적폐 세력'으로 찍혀 현 정부의 대화 파트너에서 완전히 배제된 상태라, 기업들은 소통 창구 부족으로 속앓이만 하고 있다.
현 정부의 대(對) 기업 시각과 정책 방향을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현 정권은 기업을 범법자로 보는 것 같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잘못됐으니 뜯어고치라는 식이다”라고 요약했다.
18일 경제·경영 관련 단체, 연구기관 등의 분석에 따르면 기업들이 현 정부나 사법부가 요구하는 주요 개혁을 모두 수행하려면 한해 최소 70조 원대, 최대 100조 원이 넘는 비용이 추가로 들 것으로 추산된다.
우선 지난 7월 16일 내년도 최저임금(시급) 인상폭(16.4%)이 2001년(16.8%) 이래 최고 수준으로 결정되면서, 중소기업중앙회는 당장 내년에만 최저임금 인상으로 중소기업 전체 인건비가 15조2천억 더 들 것으로 예상했다.
당장 내년부터 상위 대기업들의 법인세 부담도 2조원 이상 늘어난다.

여야는 이달 초 법인세에 '과세표준 3천억 원 초과' 구간을 새로 만들고 최고세율 25%를 적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과세표준 3천억 원 이상 기업은 2016년 기준 77개로, 정부 추산에 따르면 새 법인세 제도에 따라 내년에 2조3천억 원 정도가 더 걷힐 전망이다.
더구나 여기에 여당 주도로 국회에 발의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돼 지주회사 부채비율 규제(200%→100%)나 자회사 주식보유기준이 강화(40%→50%)될 경우, 대기업 지주회사는 계열사 지분 등을 추가로 확보하는데 수십조 원을 들여야 할 수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결과 관세율이 조정되거나(한국경제연구원 5년간 최대 19조원 수출 손실 예상), 산업용 전기요금제 개편, 탄소배출권 거래제 유상할당 등까지 실행되면 기업들의 연간 추가 비용 부담이 100조 원을 훌쩍 넘어설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현 정부의 요구를 모두 실천하려면, 기존 임금·근로 체계를 포함한 경영 시스템 전반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데, 이는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진행해야 할 사안"이라며 "비용 부담뿐 아니라 고용 확대, 임금인상, 근로시간 단축, 정규직 전환 등 주요 정책 방향 중에는 실행 과정에서 서로 상충하는 요소들까지 있어 무조건 압박한다고 기업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지만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 입장에서는 최저임금, 통상임금, 정규직 전환 등으로 비용 측면에서 큰 부담을 느끼더라도, 기업의 경제활동이 자유롭다면 비용을 어떻게든 지불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비용만 늘어나고 투자 등 기업활동 하기 좋은 여건은 보장되지 않는다면 기업의 어려움을 '엄살'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어려움을 정부, 국민, 국회 등에 호소할 '재계 대변인'이 부족한 현실도 기업들이 답답해하는 부분이다.
청와대와 정부가 잇따라 경총과 전경련 등 경제단체들을 공개적으로 질타하면서, 이들이 눈치만 보며 수개월째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선 4, 5월에도 경총은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가 한 차례 큰 '역풍'을 맞았다.
김영배 경총 부회장은 당시 "세금을 쏟아 부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임시방편적 처방에 불과하고, 당장은 효과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사회 각계의 정규직 전환 요구로 기업들이 매우 힘든 지경이다. 논란의 본질은 정규직·비정규직 문제가 아니라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라고 말하는 등 새 정부 일자리 정책에 잇따라 이의를 제기했다.
이후 경총은 문 대통령으로부터 "경총은 비정규직으로 인한 사회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질책'에 가까운 지적을 받았다.
경총의 활동은 이후 급격하게 위축됐다. 올해 통상임금, 최저임금, 정규직 전환, 근로시간 단축 등 굵직한 재계 현안이 쏟아졌지만, 경총은 재계 입장을 강하게 대변하는 성명서나 보고서를 거의 내놓지 못했다.
이처럼 정부가 전경련뿐 아니라 경총까지 배제하고 사실상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만을 경제단체로 인정하고 소통하면서, 수십 년간 경총과 협상 파트너 관계였던 한국노총 등 노조까지 경총을 '건너뛰는' 분위기다.
전경련은 아예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 '최순실 게이트' 사건에 연루돼 지난해 여론의 질타를 받은 뒤, 임직원 수는 지난해 말 215명에서 현재 110명 정도로 40% 넘게 줄었다.
삼성·포스코·현대차·SK·LG 등 회원들이 잇따라 탈회하면서 몸집(회원사 수)도 600여 개에서 400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전경련은 이름을 '한국기업연합회'로 바꾸는 등 정관 변경을 통해 '부활'을 꾀하고 있지만, 아직 새 정관을 심의·의결할 이사회나 총회 일정조차 잡지 못한 형편이다. 처지가 이러므로,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도 보고서 등을 통해 최저·통상임금, 정규직 전환, 근로시간 단축 등 현안 이슈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경제단체에 대한 정부의 압박 정도가 지나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대기업 관계자는 "경총이나 전경련 모두 성격이나 법적으로 기업들이 필요에 따라 조직한 민간 법인"이라며 "정부 돈이 한 푼도 들어가지 않는 민간단체·법인에 대해 정부가 노골적으로 질타하거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 정상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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