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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의 독립운동가 안명근 선생 |
독립기념관에서는 이를 기념해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을 1일부터 31일까지 개장한다. 특별 전시관에는 선생이 태어난 해주 광석동 마을·해서교육총회·안명근 판결문·출옥 보도기사 등 관련 사진 자료 16점이 전시된다.
안명근 선생은 1879년 9월 17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안중근 의사와는 동갑내기 사촌 동생이다.
선생은 러일전쟁 직후 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던 때에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을사늑약으로 조선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쓰러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선생은 황해도 지역의 대표적인 교육운동단체였던 안악면학회와 이를 확대, 발전시킨 해서교육총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선생은 원대한 계획에 의한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이를 추진했다. 선생은 서간도에 한인 청년들을 이주시켜 학교를 세우고 이들을 교육 후 중국의 무관학교에 보내 독립군을 양성하는 계획을 비롯해 매국노 이완용·송병준 처단과 같은 의열투쟁과 일본군에 대한 직접적인 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을 구상했다.
선생은 자신의 독립운동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먼저 무기를 구입하고 동지를 규합했다. 박만준·이승길 등의 동지와 함께 안악·신천 등의 부호를 찾아 1만원 정도의 자금을 거두었다.
선생은 황해도 일대에서 해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한 준비 단계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10년 11월 황해도 신천의 민병찬과 민영설 등에게 군자금을 요구했다.
민병찬 등은 이를 일제 헌병에게 밀고하면서 선생은 1910년 12월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에 일경에게 붙잡혔다.
일제는 1911년 1월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참여한 동지들을 모두 붙잡았다. 이것이 ‘안명근 사건’이다. 일제는 가혹한 고문을 가하는 한편 이들을 ‘강도 및 강도미수사건’으로 확대·과장하였다. 선생은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일제는 이 일을 의도적으로 확대하여 황해도의 신민회 관계자 160여 명을 붙잡아 수감하는 ‘안악사건’을 조작하였고, 또 한편으로 신민회의 주요 간부들이 테라우치 조선총독 처단을 기도했다고 날조했다. 이것이 ‘테라우치총독암살음모사건’ 또는 ‘105인사건’으로도 불리는 것으로 일제가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탄압을 위해 날조한 대표적 사건이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선생은 15년 옥고를 치르다가 1924년 출옥했으나 옥중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1927년 7월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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