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3 (월)

재경일보

[재경칼럼]엘리어트 황무지와 박한철 파라솔 배려

배려(背戾)는 국가적인 치욕까지 부른다

지난 7일 헌법재판소 정문앞에 1인 시위자들이 비나 뜨거운 햇볕을 피할 수 있도록 이동식 차양막이 설치됐다. 서초동 법원이나 검찰청앞에서도 가끔 연출되는 장면이다. 차양막은 통상 피해자측에서 친다.

그러나 이번 헌재 정문앞 차양막은 헌재에서 마련해준 것이어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신임 박한철 헌재 소장의 지시에 따른 배려라고 한다. 소통의 벽을 낮추고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잠시나마 누그려뜨리기 위해서다.

박소장은 1983년 부산지검을 시작으로 지난 40여년간 검사로 재직하다가 2011년부터 헌재 재판관을 거쳐 올 4월 소장으로 부임했다. 황우석 줄기세포와 법조브로커 윤상림 사건 등 굵직한 사안을 다룬 공안 기획통이다. 2007년 삼성그룹의 검사들에 대한 ‘떡값’ 의혹이 불거지자 특별수사·감찰본부장을 맡아 검찰 조직의 구원 투수로 나서기도 했다.

그는 평소 겸손하고 차분한 성품으로 조직 관리와 추진력이 탁월하고 부하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지극 정성이라는 법조계 안팎의 평가다. 울산지검장 시절에 직접 쓴 창작시를 직원들에게 선물하는 인간적 면모를 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요즘 슈퍼 갑들의 횡포가 언론을 달구고 있는 상황에서 박 소장의 파라솔 배려는 남다르게 다가 온다. 잔인한 4월이 가고 이제 계절의 여왕 5월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함께 있는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5월이면 어김없이 회자되는 시인이 T.S 엘리어트다. 교사와 은행원을 거친 그는 크라이티어리언(1922~39)을 창간해 유명한 걸작시 ‘황무지(荒無地)’를 발표했다.

전후 환멸과 증오, 불안에 빠진 서구 문명의 정신적 황폐를 황무지로 형상화해 묘사한 이 작품은 당대 영국 시문학계에 금자탑을 세웠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다”

오늘은 전국적으로 봄비가 촉촉이 마른 대지를 적시고 있다. 정신적 메마름과 진정한 재생을 거부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엘리어트의 시 한 귀절이 이 아침 갈증을 축이고 있다.

지난 7일 지적 장애를 겪고 있는 딸을 통학버스에 태워주려 건널목을 건너던 어머니가 갑자기 나타난 반칙운전 대형트럭에 치여 숨졌다. 사고 순간 본능적으로 초등학교 4학년 아이를 밀쳐내고 자신은 목숨을 잃었다. 아이는 인근 병원에서 왼쪽 다리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치료받고 있다.

다친 아이가 어버이날 어머니 가슴에 달아줄 유난히도 빨간 카네이션이 사고 현장에 놓여 있다. 하루빨리 아이가 회복되어 학교를 안전하게 다니길 소망해본다. 거제시 사회복지협의회에서 암 수술을 받은 남편과 세 살베기 등 아이 셋 가정을 위해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어디 우리 주변에 안타까운 일이 이뿐이랴. 학생 안전지역(Safe zone) 준수와 함께 그물망 복지를 뒤돌아보는 시간이다. 학생위험 제로 환경조성은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대선 공약사항이기도 하다.

배려는 상거래에서도 마찬가지다. 요즘 언론에 비뚤어진 갑을관계로 슈퍼갑들이 연일 곤욕을 치루고 있다. 갑을관계는 남을 위한 배려에서 출발해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에 배려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는 배려(配慮)와 배반되고 어그러지는 배려 (背戾)’ 두가지 뜻이 있다.

문제가 된 슈퍼갑들의 난폭 운전은 남을 해치는 배려(背戾)로 곧잘 치명적인 자살골로 치다르며 개인적인 망신은 물론 폐업까지 자초하기도 한다. 배려의 오남용 사례는 지난 3월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의 아들이 영훈 중학교 사회적 배려대상자로 입학해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이 일로 사회적 배려대상자 입학기준이 바뀌었다. 배려는 좀 거창하게 표현하면 노블레스 오빌리쥬고 경제민주화다.

헌재가 시위자가 없으면 차양막을 정문 안쪽에 비치했다가 시위자가 등장하면 정문 앞에 설치해주고 있다. 소득양극화와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는 요즘 강골 이미지였던 박한철 파라솔 배려는 그래서 의미가 더 깊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정상외교로 4박 6일의 숨가쁜 미국 방문 일정을 마무리하고 오늘 귀국한다. 동행한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이 방미 체류중 허락없이 한 여성의 엉덩이를 만졌다고 국내외에서 난리다. 윤대변인의 경질을 넘어 국가적인 치욕이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는 5월이다. 고위 공직자들과 노블레스들을 포함해 대기업, 은행권들의 배려(背戾)아닌 배려(配慮)를 다시한번 촉구한다.

 

저작권자 © 재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 기사

임금체계와 조직 문화의 갈등

임금체계와 조직 문화의 갈등

우리나라의 임금체계에 대해 논의하면서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언급되는 것은 임금의 연공성이다. 우리나라의 임금체계에서 연령이나 근속연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OECD 국가 중 근속연수에 따른 임금 상승률이 가장 높은국가에 속한다.

'태평양 쓰레기 섬'이라는 환상, 과학이 가리키는 진짜 범인은

'태평양 쓰레기 섬'이라는 환상, 과학이 가리키는 진짜 범인은

해양쓰레기 이슈에서 ‘거대 태평양 쓰레기 섬(Great Pacific Garbage Patch, 이하 GPGP)’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실체는 오해로 가득하다. ‘Patch’는 ‘섬(Island)’이 아님에도, 대부분 발을 딛고 설 수 있거나 배가 못 지날 만큼 빽빽한 섬으로 착각한다. GPGP가 한반도의 16배 크기라는 이야기도 통용되지만, 실제로는 배를 타고 지나가도 보이지 않으며 인공위성으로도 식별이 불가능하다.

한국 기업문화와 노사관계의 기원

한국 기업문화와 노사관계의 기원

조직문화와 노사관계는 단순한 기업 운영의 요소의 수준을 넘어 한 국가의 경제적 역동성과 사회적 안정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핵심 요인들이다. 특히 한국은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글로벌화의 과정을 거치며 독특한 조직문화와 노사관계를 형성해 오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기업의 생산성과 혁신 역량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삶의 질 그리고 사회적 갈등 수준에도 깊은 영향을 미쳐 오고 있다.

바다 뒤덮은 ‘하얀 재앙’, 스티로폼 부표 전부 교체해야

바다 뒤덮은 ‘하얀 재앙’, 스티로폼 부표 전부 교체해야

"여름철인데 바닷가에 하얀 눈이 내렸더라."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한 이 한마디는 우리 바다가 처한 비극적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여름 해변을 뒤덮은 '하얀 눈'의 정체는 다름 아닌 스티로폼 양식장 부표 쓰레기다. 이들은 햇볕과 거친 파도에 쉽게 부서지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플라스틱으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