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주의 쫓아냈던 자유주의, 이젠 기꺼이 내셔널리즘을 추종하기 시작했다.
한국 경제는 2008년 9월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현재까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대중 무역의존도가 높아 미국과 유럽에 비하면 충격이 적은 편이다. 미국의 극심한 빈부격차, 남유럽의 경제 몰락 같은 '진짜 위기'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증시 거품이 꺼질 거란 우려와 국내 대기업의 매출 부진, 내수침체 장기화가 이어지며 머지않아 '그리스 꼴'이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이 같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의 폐단'으로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 국가 경제정책을 살펴보면, 오히려 국가계획경제에 가까울 정도로 시장에 개입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4대 강 사업이나 자원외교 등은 기업 차원에선 엄두도 내지 못할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정책이었고, 기업이 정부에 의존해 수익을 도모하는 모습도 다수 관측할 수 있었다.
이번 엘리엇 사태에서 연금공단 등 국가기관이 대주주 자격으로 삼성물산 합병 안에 손을 들어준 것 역시 국가 개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현 행정상 주류 개념 중 하나인 '신관리주의'는 민영화와 민간위탁, 경쟁과 고객 서비스 지향을 추구하는데, 현 연금공단은 국내 상위 기업 주식을 다수 보유하고 사실상 정경유착과 다를 바 없는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신관리주의에 반대되다는 거다.
주목해야 할 건 엘리엇 사태에 '국가주의적' 면모가 보인다는 점이다. 삼성은 광고에서 "한국 대표기업으로서 기업가치와 주주이익의 극대화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으며, 일부 투자자를 제외한 국민 대다수도 엘리엇을 삼성이 아닌 '한국의 적'으로 인식했다. 국내 GDP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기업이 해외 펀드에 의해 피해를 입는다면 개인에게도 피해가 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적이지만 자유주의적이기도 한 반응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다른 국가에서도 관측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신냉전 구도를 형성해가고 있으며, 유로존은 독일과 그리스를 중심으로 지역단위, 국가단위로 분열할 조짐이 보인다. 한국과 일본은 우방임에도 불구하고 환율을 동원한 경쟁을 멈추지 않으며, 민족 감정으로 대립각을 세워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각 국가 국민 대다수도 이 시류에 동조하고 있다.
이는 세계가 파시즘과 전체주의에 휘둘리던 19세기 초반과는 또 다른 양상이다. 정부가 국민에게 애국심을 강조하고, 선동과 기만을 통해 경쟁국에 대한 적개심을 부채질했던 1∙2차 세계대전, 냉전 시기와 달리, 21세기 인류는 개인의 이득을 근거로 타국에 대한 배타심을 키운다. 이들은 웹과 온라인 환경을 활용해 전 세계 금융과 경제 정보를 직접 수집해 어떻게 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냉정히 판단한다. 만약 자신이 부당한 손실을 입게 될 경우 분노를 표하는데 거리끼지 않는다.
20세기만 해도 지식인들은 세계화가 국가간 경계를 허물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실제론 국가간 무한경쟁이 시작됐고, 개인은 '국익'에 더 집착하게 됐다. 국가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게 개인에게 실제적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과거 권의주의와 국가주의를 내쫓았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이젠 자발적으로 내셔널리즘을 추종하기 시작한 거다.
새로운 내셔널리즘은 '애국심'이 결여돼 있다는 점에서 과거 국가주의와 다르다. 개인은 이권에 의해 더 작은 조직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강하게 불고 있는 '분리주의'가 그 조짐이다.
분리주의는 한국에선 아직 생소한 개념이지만, 미국은 흑인 커뮤니티가 밀집된 지역 중심으로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영국은 스코틀랜드에서, 스페인은 카탈루니아 지역을, 이탈리아에선 베네치아 지역을 중심으로 분리독립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분리를 요구하는 배경엔 타 지역과의 인종적, 지역적, 문화적 이질성이 뒷받침하지만, 결정적 원인은 경제적 이권 추구에 있다.
경제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며 국경의 아노미지수는 나날이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와 국민도 이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언젠가 총과 포가 '꽝'하고 터질 거라면 섣부른 걱정일까? 새로운 전쟁이 자유주의에 전체주의 중 어느 얼굴을 하고 등장할진 아직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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