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3 (월)

재경일보

<유성호의 문화비평>러시아의 ‘칼라복사기 등록법’

[세상에 이런 법이?!]러시아에서는 칼라 복사기나 잉크젯프린터를 사서 사용하려면 내무부에 등록해야 하는 법이 있었다. 지난 1994년 만들어진 ‘칼라복사기 등록·보관·사용방법에 관한 정부령’이 그것이다. 이 법에 따르면 인쇄기, 복사기, 프린터를 구입한 사람은 1개월 이내 서면으로 내무 당국에 등록해야 한다.

등록 시 기기가 위생기준에 적합하다는 정부발행 증명서도 함께 제출해야 한다. 또 기기는 격리된 별도 방에 보관·사용해야 하며 경보기나 튼튼한 시건장치를 통해 외부 침입을 막아야 한다. 아울러 인쇄물 수량과 인쇄 내용을 장부에 기재하고 보관해야 하는 등 엄한 규제로 다뤘다.       

소련 붕괴 후 90년대 러시아는 급격한 시장경제 변화를 맞았다. 변화는 발전이 아닌 혼란을 가져왔다. 특히 92~94년은 물가가 연간 3~26배 급등하는 하이퍼인플레이션 속에 치안이 급속히 악화되기도 했다.

경제가 인플레에 허덕이자 화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러시아 내부에서 슬슬 위조지폐가 늘기 시작했다. 이 법은 당시 인플레이션을 틈타 횡행한 지폐 위조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법이 만들어질 무렵 러시아 내에는 이에 해당하는 기기가 얼마 없었다. 약제를 사용하는 전문 인쇄기기에나 적용하던 위생 기준을 들이댄 것만 봐도 그렇다. IT 기술 발달로 프린터와 복사기 보급이 급격히 확대될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모든 걸 차치하고 정작 문제는 러시아 내 인쇄회사나 프린터 제작사는 이 법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의 한 가운데는 부패한 러시아 경찰이 있다. 번잡한 프린터 등록이나 검사 업무를 러시아 경찰이 온전히 하고 다녔겠냐는 지적이다. 이 말 속에는 이 규제가 ‘부패재료’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난해 2월 러시아 최고재판소는 기기 등록이나 경보기 설치 의무 등에 관한 부분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현실에 맞지 않은 규제로 인해 많은 민원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법이 위폐 생산을 막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한편 러시아는 위조지폐의 원산지로 손꼽히는 북 카스카프 지역을 인접하고 있어 위폐 유통에 몸살을 앓고 있다. 체첸공화국, 다게스탄 등 분쟁 지역에서 반군들이 무기 구입을 위해 위폐를 찍어내기 때문이다.

워낙 많은 위폐가 돌자 러시아 당국은 소량 유통업체는 손도 못 대고 대량 위조단 단속에 집중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러시아 위폐 발생량은 영토 중앙부에서 60%, 북쪽에서 16%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유성호(문화비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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