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3 (월)

재경일보

도촬 범죄가 초래한 디스토피아... 만화가 이토 준지의 '길 없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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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가면'뿐인가?

만화 깨나 읽어다는 사람은 '이토 준지'란 이름을 한 번쯤 들어 본 적 있을 거다. 특유의 기괴하면서도 섬세한 화풍과 엽기적 상상으로 공포만화의 대가로 올라선 그는, 한국에서도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다.

그의 작품은 서사구조가 함축적이고 상징이 많아 다양한 해석이 따라붙는다. 독자에 따라 외모지상주의와 천민자본주의, 인간성 상실과 권력 앞에 무력해지는 인간의 본성을 대입하기도 한다. 만화가가 그려둔 상징적 공포에 자신들이 현실에서 겪은 불쾌함을 대입하는 것이다. 뼈와 살점이 노골적으로 튀는 미국풍 슬래셔 뮤비나 미스터리를 강조하는 일본식 공포물과는 또 다른, 언제나 맞닥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일상적 공포를 느낄 수 있다.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단행본에 실린 '길 없는 거리'란 단편이다. 주인공 소녀는 살인마가 등장하는 이상한 꿈을 꾼 후, 가족들이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문 장지에서부터 두꺼운 벽, 지붕까지 구멍을 뚫는 집요한 시선에 버티지 못한 그녀는 이모의 집으로 가출을 시도한다.

그런데 이모가 살고 있는 동네는 기억과 달리 이상한 장소가 되어있었다. 건물이 서로 연결돼 사람들은 서로의 집을 통행로 삼아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고, 프라이버시란 존재하지 않았다. 사생활을 지키고 싶어 자신의 문을 닫아두면 "길을 막아두다니 이기적인 놈."이라며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몰매를 때렸다. 결국 사람들은 최소한의 인격을 지키기 위해 가면을 쓴 채 살아가게 되었다.

'길 없는 거리.'는 인간이 비밀 하나 지킬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겁하고 악랄한 '약한'존재가 될 수 있음을 상직적으로 묘사했다. 물론 현실에서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정권의 유대인 수용소나,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라면 모를까. 이성을 기반으로 한 시민 사회가 만화처럼 타락할 거란 상상은 기우라 하기도 우습게 느껴진다.

하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로 끊임없이 이어진 길을 '네트워크'에, 남을 품쳐보려고 뚫은 구멍을 '카메라'에, 프라이버시가 사라진 사회를 '소라넷'과 같은 도촬 음란물 공유 사이트에 대입하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이미 '길 없는 거리'에 갇혀 있는 건지도 모른다.

 

도찰 범죄 단속에 대한 게시물에 달린 댓글
도찰 범죄 단속에 대한 게시물에 달린 댓글

 

경찰청이 지난 6월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도촬 범죄로 검거된 건수는 총 6371건으로, 1년 전인 2013년에 비해 45%나 늘어난 수치라고 한다. 몰카 몸죄는 지난 2011년부터 매년 50% 폭증세를 기록해 5년 새 5배나 증가했다. 스마트폰 등 고성능 모바일 기기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이동통신망 네트워크가 '초개인적(super-individal)'통행로를 만들기 시작했던 거다.

'사생활 지키려고 문을 잠갔다가 몰매를 맞는 현상'도 조짐이 보인다. 한 음란물 공유 사이트는 도촬 범죄 처벌 소식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게시물로 가득하다. "여성부와 여성단체가 예산을 늘리려 일부러 여론을 크게 만들고 있다.", "뉴스에 나오는 건 초소형 카메라를 이용한 범죄니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우리 같은 사람은 다르게 처벌해야 한다.", "도촬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만 늘리는 것 같아 속상하다." 등 적반하장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음모론이 쏟아지고 있다. 이 사이트 가입자들은 성범죄로 적발되었을 시 형량을 줄이기 위한 꼼수도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각종 문학 작품에서 가면은 자아 외의 인격이나 이중적 태도를 나타내는 도구로 쓰인다. 가면을 쓰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고, 죄책감에서도 자유로워진다. 이미 우린 온라인 환경에서 '가면'이 주는 자유와 달콤함을 맛보며 무책임한 존재가 되었다. 이토 준지의 만화에서 처럼 우리가 마지막으로 숨기 위해 찾는 곳이 가면이 된다면, 언젠가 서로의 권리를 침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데 무감각한,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 만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주인공의 이모다. 그녀는 프라이버시 지키는걸 완전히 포기해 아예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녀는 이제야 자유로워졌다며 웃지만 표정은 경직되고 과장돼 있다. 마치 페이스북처럼, 모두에게 공개되기에 즐거운 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함께 이곳을 탈출하자고 붙잡는 주인공의 말에 그녀는 쓸쓸히 뒤돌아 거리로 돌아간다. 이미 '길 없는 거리'에서 완전히 적응한 거다.

 

이토 준지 <길 없는 거리> 단행본 표지
이토 준지 <길 없는 거리> 단행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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