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해 정부가 국가 책임을 전제로 한 배상·지원 체계로 전환하겠다고 밝히면서, 10년 넘게 이어진 피해 구제 논의가 중대한 분기점을 맞았다.
참사를 사회적 재난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국가가 전면에 나서겠다는 이번 방침은 피해자 구제 방식뿐 아니라, 기업 책임과 국가 역할의 경계를 다시 설정하는 계기로 평가된다.
◆ 대통령 사과와 국가 책임 선언의 의미
이재명 대통령은 24일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해 “국가가 피해를 온전히 배상하겠다”며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공식 사과와 애도의 뜻을 밝혔다. 대통령이 참사 책임을 국가 차원에서 직접 언급한 것은 상징성이 크다.
이 대통령은 1990년대부터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된 제품이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했다는 점을 짚으며, 관리·감독 실패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단순한 지원 확대를 넘어 제도적 반성을 전제로 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국민 생명과 안전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라는 발언은 향후 유사한 사회적 참사에서 국가 개입의 기준점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 사회적 참사로 규정된 가습기살균제 사건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1994년부터 판매된 제품이 폐 손상 등을 유발하며 다수의 사망자와 피해자를 낳은 대표적 환경·보건 참사다. 2011년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를 통해 살균제와 폐 손상 간 인과관계가 확인됐지만, 이후 책임 소재를 둘러싼 법적 다툼이 이어지며 피해 구제는 장기간 지연돼 왔다.
누적 피해 신고자는 8천 명을 넘어섰고, 이 가운데 정부로부터 피해를 인정받은 인원은 6천 명 안팎에 이른다. 그러나 상당수 피해자는 장기 소송과 입증 부담으로 인해 실질적인 배상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반복돼 왔다.
정부가 이번에 사건을 ‘사회적 참사’로 명확히 규정한 것은, 단순한 환경 사고가 아니라 국가의 관리·감독 실패가 결합된 재난이라는 점을 공식화한 조치로 해석된다.
◆ 기업 단독에서 국가·기업 공동 배상으로
이번 대책의 핵심은 손해배상 구조를 기존 기업 단독 책임에서 국가와 기업의 공동 부담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기후에너지환경부 소속 피해구제위원회는 국무총리 소속 배상심의위원회로 개편된다.
정부 출연금도 재개된다. 2019~2021년 이후 중단됐던 정부 출연은 내년부터 연 100억 원 규모로 다시 투입될 예정이다. 배상 범위 역시 치료비에 국한되지 않고 일실이익과 위자료까지 포함하도록 확대된다.
피해자는 일시금 지급과 단계적 지급 방식 가운데 선택할 수 있으며, 이미 구제급여를 받은 피해자도 사안에 따라 추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배상 구조 전반을 국가가 관리하는 체계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이다.
◆ 기업 책임의 한계, 국가 전환을 부른 결정적 요인
국가 책임 전환의 배경에는 기업 책임 중심 구제 구조가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현실적 평가가 자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 기업인 옥시레킷벤키저는 최근 피해자와의 조정 절차에서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OECD 다국적기업 책임경영 한국연락사무소(NCP)는 옥시와 피해자 간 조정을 시도했지만, 양측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사건을 종결 처리했다. 이 절차는 법적 구속력이 없어, 기업에 추가 배상 책임을 강제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기업 측은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인정된 피해자에 대해서는 이미 보상을 마쳤고, 정부 주관 피해구제기금에도 분담금을 납부했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반면 피해자 측은 ‘등급 외’로 분류된 다수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 구제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처럼 기업 책임에만 의존한 배상 방식이 장기 소송과 조정 실패로 이어지면서, 피해자 보호가 제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정부 내부에서 확산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 판결 이후 정책 전환, 남은 제도적 과제
이번 정책 전환은 지난해 6월 대법원이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해 국가의 일부 책임을 인정한 판결 이후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사법적 판단이 정책 변화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제도적 연속성이 확보됐다는 평가다.
해외에서는 화학물질 피해 발생 시 국가가 우선 배상한 뒤 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하는 구조가 일반적이다. 이번 조치는 국내 제도가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한 걸음 다가섰다는 신호로도 해석된다.
다만 배상 기준의 명확화, 국가 재정 부담과 기업 책임 간 경계 설정, 안정적 재원 확보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국가 책임 강화가 사후 보상에 머물지 않고, 예방 중심의 화학물질 관리 체계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향후 정책 평가의 기준이 될 전망이다.
☑️ 요약:
정부가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해 국가 책임을 전제로 한 배상체계 전환을 공식화하며 피해자 구제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대통령의 직접 사과와 공동 배상 구조는 관리·감독 실패를 제도적으로 인정한 조치로 평가된다. 다만 기업 책임의 한계를 보완하는 동시에 국가와 기업의 책임 경계를 어떻게 정립할지가 향후 정책의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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