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3 (월)

재경일보

우리에게 필요한건 애국심이 아니라 긍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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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었던 지난 8일, 경기 북부 지방엔 불안한 천둥번개가 쳤다.

누전이 있었는지 양주로 향하던 전철이 갑자기 멈췄다. 탑승객들은 어리둥절, 먹구름 낀 차창 밖을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곧 승무원이 안내 방송을 했다. 급작스럽게 정차해서 죄송하나 동요하지 말고 안전한 열차 안에서 대기해달라는 평범한 방송이었다.

"제 2의 세월호 희생자가 되긴 싫다." 한 남성이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비상탈출 메뉴얼에 따라 열차 문을 열고 거침없이 밖으로 나섰다. 추적추적 미직지근한 빗물이 어깨를 적셨고, 역까진 꽤 걸어가야 했지만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에 따르는 것보단 덜 불안한 듯 싶었다. 곧 그에 동조한 다른 탑승객들도 하나 둘 열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의견은 분분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세월호 사건까지, 국가 기관에 배신당한적이 얼마나 많냐. 이해가 간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통제를 따르지 않고 선로에 나가는 건 더 위험한 일이다."라며 비판적 시각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수긍할 수 있다."란 분위기였다.

 

양주역 부근, 정지된 전철 문을 열고 내리는 시민들
양주역 부근, 정지된 전철 문을 열고 내리는 시민들

9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표한 '한눈에 보는 정부 2015' 보고서에 의하면 2014년 기준 한국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34%로 41개국 가운데 26위를 차지했다. 국민 10명 가운데 고작 3명만 정부를 신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개발도상국은 인도네시아 (65%), 터키 (53%), 에스토니아 (41%), 브라질 (36%) 보다 낮은 수치였다.

한국보다 낮은 순위에 있는 국가는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 등 PIGS로 묶이는 재정위기 국가들이었다.

한편, 과거 한 유머 커뮤니티에서 네티즌 2만 5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부 기관별 신뢰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기관은 우체국(85%)였다. 이어 기상청이 4%로 2위를 차지했고, 국세청, 교육청, 경찰, 국방부, 국정원, 식양청 등은 모두 3% 이하로 표를 받았다.

특히 검찰을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0%였다. 이번 조사에서도 한국의 사법제도 신뢰도는 27%로 42개국 가운데 38위의 저조한 성적을 받았다.

 

한편 광복절 70주년을 앞두고 공공기관은 태극기 달기 운동 계획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울산시는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0일부터 15일까지를 태극기 게양 주간으로 정해 운영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30일엔 시민 동참 유도를 위해 대형 손도장 태극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아파트 밀집지역에도 태극기 달기 동참을 적극적으로 요구할 계획이다.

아울러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14일과 광복절 당일인 15일엔 주요 간선도로변에 태극기를 줄줄이 게양하고, 시내버스 700여 대에도 태극기를 부착할 계획이다. 연휴간 온 거리에 태극기가 넘실대는 장관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강진군은 도로와 공원에 태극 문양 바람개비 800개를 설치했고, 성주군은 태극기 회전 홍보찹을 세웠다. 청주시 역시 가정용 태극기 1천 개와 차량용 태극기 700개를 시민에게 제공하며, 도로변 52개 구간에 태극기 9천900개를 달 예정이다.

'태극기 트렌드'를 앞장서 주도하는 건 역시 서울시다. 정부 서울청사 등 공공기관 외벽에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는 건 물론, 한화생명, 현대해상화재,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신한은행, 삼성생명 등 중심가에 위치한 민간기업도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는데 여념이 없다.

국경일에 태극기 달기 운동을 추진하는 건 딱히 올해만의 일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사회 전반적으로 애국심이 하락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고, 애국심 고취란 명목  하에 태극기와 애국가 등 국가 상징물을  강조하는 이벤트도 많아졌다.  최근엔 채용 면접에서 애국가 4절을 외라고 시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전 국가적인 애국심 향상 프로젝트의 결과는 '답보'상태다. 아니 애국심 강요에 반발심까지 생기고 있는 게 현실이다.

2014년 미국 기업연구소가 실시한 애국심 관련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임이 매우 자랑스럽다."라고 응답한 비율은 고작 36%에 불과했다. 애국심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론 '권력자의 부정부패 뉴스를 들을 때', '시민의식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빈부격차를 느낄 때', '실업률이 높아질 때', '집권층의 리더십, 역량이 부족하다 느낄 때' 등이 주로 꼽혔다.

기관 인터뷰 결과 태극기 달기 행사에 대한 시민 의견은 대체적으로 "태극기를 단다고 없던 애국심이 생기는 건 아니다. 보여주기 식 행사에 불과하다."로 부정적이었다. 전국적 행사를 계획하고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하는 것에 비하면 그리 큰 효과가 없었던 거다.


우린 애국심에 앞서 긍지가 필요하다.

물론 국가 발전을 위해 애국심은 필요하다. 높은 애국심 국민의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국가에 대한 의식을 높이며, 국민의 자긍심을 향상해 삶의 질을 높이는데도 효과가 있다. 한국 국민의 애국심 수준이 낮아지는 현상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애국심 하락의 원인은 정부에 대한 불신과 믿고 따를 수 없는 사회 지도층, 불안한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나오는 것이지 국민에 있지 않다.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라며 일방적으로 국민을 교육하려 하고 책임을 돌리려는 정부의 행위는 부당하고 불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역사속 수많은 지식인들이 애국심을 경계할 것을 강조하는 글귀를 남겼다. 심지어 독일 나치당 수뇌부였던 헤르만 괴링 역시 애국심이 국민을 지도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인정했다. 실제로 독일 사회는 나치 독재의 경험 때문에 과도한 애국심을 경계하는 태도를 보인다. 유럽 선진국이 의외로 애국심 지수가 높지 않게 나타나는 건 독재를 반성하는 경향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유럽인이란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CSA가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유럽인 대상 여론조사에서 '유럽인이란 사실에 긍지를 느낀다."라는 응답은 항상 70% 이상의 높은 응답률을 기록하고 있다. 높은 시민 의식과 존경할 수 있는 사회지도층, 상생을 추구하는 삶의 지향이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뒷받침하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난 삼일절 서울의 밤거리엔 찢어지고 흙탕물에 더럽게 물든, 하루만에 쓰레기가 돼 발끝에 차이는 태극기 더미가 쌓여있었다. 강요된 애국심은 하루 만에 서글픈 것이 되어 버렸다. 국민이 긍지를 갖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부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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